중국의 역사 (요약)

 

중국의 역사는 수천 년에 걸쳐 다양한 왕조와 사상, 문화가 발전하고 교체된 과정입니다.

아래는 주요 시대 별로 중국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정리한 내용입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시고,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추가하며 공부함이 좋을 듯하여  앞으로 지속적으로 내용을 보완해 작성하려고 합니다.

1. 춘추전국 시대(BC770 ~ BC221)

  • 주 왕조가 약해지고 수많은 제후국들이 경쟁하던 시기였다.

  • 철기 보급농업·상업의 발전으로 사회·경제적 변화가 컸다.

  • 제자백가(유가, 도가, 법가, 묵가 등) 등 다양한 사상이 등장해 이후 중국 사상의 근간이 되었다.

  • 진(秦)나라가 상앙의 변법 등 개혁을 통해 국력을 키워 전국을 통일할 기반을 마련했다.

2. 진·한 제국(BC221 ~ AD220)

  • 진나라(기원전 221~206): 시황제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군현제 실시, 문자·화폐·도량형 통일, 만리장성 축조 등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다. 그러나 가혹한 통치로 인해 단명했다.

  • 한나라(기원전 202~220): 유방(고조)이 한을 세우고, 한 무제 때 유교가 국가 통치 이념이 되었으며, 비단길을 통한 동서 교역이 활발해졌다. 농업·상업 발전, 서역과의 교류, 호족의 성장, 종이의 보급 등 문화와 기술이 크게 발전했다.

3. 위진남북조 시대(220~589)

  • 후한 멸망 후 삼국시대(위·촉·오)와 5호 16국, 남북조 등 분열과 혼란이 이어졌다.

  • 북방 유목민족과 한족의 융합(호한 융합)이 일어나고,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어 융성했다.

  • 문벌 귀족 사회와 9품중정제 등 귀족 중심의 사회 구조가 형성되었다.

4. 수·당 제국(581~907)

  •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589)하고, 대운하를 건설해 남북 경제 통합을 이룸.

  • 당나라는 율령 체제, 과거제, 균전제 등 중앙집권적 제도를 완성하고, 장안을 국제도시로 발전시켰다.

  • 동서 교역(비단길), 국제적·귀족적 문화, 불교의 융성, 다양한 외래 종교와 문화의 수용 등 세계 제국의 면모를 보였다.

  • 8세기 중반 안사의 난 이후 절도사의 성장, 균전제 붕괴 등으로 쇠퇴하였다.

5. 오대십국 시대(907~960)

  • 당 멸망 후 약 50여 년간(907~960), 중국은 화북의 5개 왕조(오대)와 남부의 여러 지방 정권(십국)으로 분열되어 혼란이 지속되었다.

6. 송나라(960~1279)

  • 북송(960~1127): 조광윤이 송을 세워 중국을 재통일했다. 경제와 문화가 크게 발전하고, 성리학이 등장했다. 그러나 북방의 거란(요), 서하, 여진(금) 등 이민족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 남송(1127~1279): 금나라의 침입으로 수도를 남쪽 항저우로 옮기고 남송이 시작되었다. 남송은 해상 무역과 상공업이 번성했으나, 결국 몽골(원)에 의해 멸망했다.

7. 원나라(1271~1368)

  •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건국한 왕조로, 중국 전역을 최초로 이민족(몽골족)이 지배했다. 광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동서 교역(실크로드)이 활발했고,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융합되었다. 하지만 한족의 반란과 내분으로 쇠퇴해 홍건적의 난을 계기로 멸망했다.

8. 명나라(1368~1644)

  • 주원장이 한족 왕조인 명을 세웠다. 중앙집권 체제와 과거제를 강화하고,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대외 교류(정화의 원정 등)를 펼쳤다. 후기로 갈수록 관료 부패, 외침(임진왜란 등), 농민 반란(이자성의 난) 등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멸망했다.

9. 청나라(1616~1912)

  • 만주족(여진족)이 세운 왕조로, 후금(1616)에서 청(1636)으로 국호를 바꾸고 1644년 베이징을 점령해 중국을 지배했다.

  • 청은 한족을 지배하면서도 한족 관료를 중용하고, 티베트·몽골 등 다민족을 포용했다. 19세기 이후 서구 열강의 침략과 내란(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쇠퇴하다가 1912년 신해혁명으로 멸망했다.

10. 청나라 멸망과 중화민국 수립 (1912)

  • 1911년 우창 봉기를 계기로 신해혁명이 일어나며, 1912년 청나라가 공식적으로 멸망하고 약 2,000년간 이어진 황제정이 막을 내렸다.
  • 쑨원을 중심으로 아시아 최초의 공화정인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 하지만 신생 공화정은 군사력이 약했고, 위안스카이 등 군벌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며 군벌 혼란기가 이어졌다.

11. 군벌 시대와 국민당·공산당의 대립 (1916~1937)

  • 위안스카이 사망(1916) 이후 각지 군벌이 난립하며 전국이 분열되었다.

  • 쑨원의 국민당(국민정부)과 중국공산당(1921년 창당)이 등장해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다.

  • 1920년대 중반, 국민당과 공산당은 한때 제1차 국공합작을 통해 군벌을 타도하고 북벌을 전개했으나, 곧 결렬되어 내전이 시작되었다.

12.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1937~1949)

  • 1937년 중일전쟁(항일전쟁)이 발발,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에 맞서 싸웠다.

  • 1945년 일본 패망 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국공내전에 돌입했다.

  • 공산당은 농민과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국민당은 부패와 민심 이반으로 약화되었다.

13.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현대 중국 (1949~현재)

  •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대만)으로 이동해 오늘날까지 별도의 정부(대만)를 유지하고 있다.

  •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 격동의 시기를 거쳤다.

  •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 시장경제를 도입하며 고도성장과 현대화를 이뤘고, 현재는 세계 주요 강대국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주(周) 왕조, 질서와 통치의 원형을 세우다 – “천명은 어디서 오는가?”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을 통일한 주(周), 그들이 남긴 정치와 제후의 세계

이 글의 핵심

중국의 주(周) 왕조는 은나라를 제압하며 중원을 통일한 고대 왕조로, 그들의 통치 철학인 천명사상과 봉건제도는 이후 중국 정치 체제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주 왕조는 혁신적 리더십으로 통치를 실시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봉건제의 구조적 한계가 드러나 후속 시대의 혼란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주 왕조의 정치 시스템과 그 영향력을 살펴보겠습니다.

역성혁명과 천명: 하늘의 명령이 이동하다

주 왕조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은 단순한 권력 교체가 아닌 천명(天命)이라는 사상적 기반 위에 서 있었습니다. ‘천명’은 대자연의 질서처럼, 왕권은 뒤집어지기도 한다는 개념입니다. 이는 은나라의 마지막 군주 주왕(紂王)의 폭정과 타락이 하늘의 명령을 저버렸다는 해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주 왕조는 이러한 논리를 통해 하늘의 명이 주에게 내렸음을 주장했어요.

특히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은 은나라의 부패를 치열하게 비판하며, 은을 무너뜨리기 위한 정당성을 확보했습니다. 무왕이 이끈 ‘목야의 전투’는 주의 군주로서 첫 발을 내딛는 중요한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성혁명의 사상은 후대에도 여러 차례 사용되는 정치적 수단이 되었습니다.

봉건제: 혈연으로 맺어진 제후의 세계

주 왕조가 펼친 정치 제도의 핵심은 봉건제(封建制)입니다. 봉건제란, 주 왕이 제후에게 각지의 영지를 할당하여 통치하게 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유럽의 봉건 제도와 달리, 주의 봉건제는 혈연관계를 매우 중시했습니다.

문왕과 무왕은 자신의 친족과 공신을 제후로 임명하여 전국 각지에 배치했으며, 제후는 중앙 정권인 천자의 권위를 인정하며 지방을 다스렸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은 중앙집권과 지방자치의 균형을 추구했고, 효과적으로 주 왕조의 통합체제를 구성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후국들이 점점 독립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후일 혼란의 배경이 됩니다. 예를 들어,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제후들이 서로 충돌하며 주 왕조의 권위가 점차 약화되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주 왕조의 정치 시스템: 중국 왕권의 원형

주 왕조가 시행한 봉건제와 천명사상은 단순한 통치 전략을 넘어서 중국 왕권의 원형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주 왕조의 통치 원리는 이후 중국 사상과 정치구조에 오랜 영향력을 미칩니다. 이후 여러 왕조들이 주의 정치체제를 참고하여 그들만의 변화를 시도했지만, 그 근본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주 왕조의 작책(鼎)은 왕권의 상징으로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이는 단순한 주방 기구가 아니라, 왕의 통치를 상징하는 기념물로 사용되었어요. 왕권의 무게와 균형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이 작책은 이후에도 중국 문화에서 중요한 상징물로 남아 있었습니다.

봉건제의 한계: 시간이 흐르며 드러나다

시간이 흐르며 제후국들이 자립적으로 강해지면서 주 왕조의 봉건제는 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각 지방 제후국들이 점점 독립적으로 변하며 주 왕조의 통합체제는 점차 흔들렸습니다. 이러한 양상은 춘추전국시대의 전초가 됩니다.

특히 경제적, 군사적 자립이 확산되면서 제후들은 중앙 권력의 명령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들만의 정책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 전반에 걸쳐 권력 구조의 변동을 불러일으키며, 후속 시대인 춘추전국시대를 특징짓는 혼란의 요인이 됩니다.

정리를 마치며

이처럼 주 왕조는 단순한 정복왕조가 아닌, 혁신적인 정치 철학으로 통치 질서를 확립한 중요한 역사적 주체였습니다. 비록 시간이 지나며 그 체제가 변화하고 약화되었지만, 주 왕조가 심어놓은 통치 원칙과 사상은 중국 정치와 문화에서 공고한 유산으로 남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천명사상과 봉건제도의 유산을 통해 권력과 통치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것은, 주 왕조가 단순한 경과로 잊혀지지 않는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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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개관

제후국의 각축 속에 태어난 질서와 사상, 법과 정치의 원형을 찾아서

이 글의 핵심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경쟁과 함께 큰 사상적 변화를 경험한 시기입니다. 주 왕실의 힘이 약화되고 제후국들이 독자적으로 성장하면서 정치적 배경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다양한 철학이 등장하여 이후 중국의 사상과 제도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제후국 간의 정치적 배경과 시대 구분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약 770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의 시기로, 중국 대륙에서 주 왕실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여러 제후국들이 독자적으로 성장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두 개의 주요 단계로 나뉘며,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로 구분했습니다. 춘추시대는 주 왕조의 수도가 동쪽으로 옮겨지면서 진(晉), 제(齊)와 같은 강력한 제후국들이 중심이 되었고, 각각의 세력 간에 협력과 배신이 반복되었던 시기였습니다. 이후 전국시대는 각국의 힘이 비교적 균등하게 맞서면서 보다 치열한 경쟁과 전쟁이 잇따랐던 시기였습니다.

철기 사용과 농업혁명, 사회 구조 변화

이 시기에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농업의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철제 농기구의 도입은 보다 효율적인 경작을 가능케 했고, 이는 잉여 생산물의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농업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시장이 발전하고 교역이 증가하면서 도시가 발달했고, 상인계층과 장인계층도 두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혈연사회 구조에 변화를 가져왔고, 사회가 계층화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법과 제도의 변화, 능력주의 관료제 형성

정치 체제 또한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기존의 혈연이나 가문 중심의 사회는 점차 능력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각 제후국은 더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관리들을 능력에 따라 등용하기 시작했으며, 법제와 세금 제도를 체계화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전국 단위의 법률 집행과 군현제, 즉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체계가 일부 국가에서 시도되었습니다. 이는 오직 혈연이 아니라 능력에 따른 관료제가 형성되었던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제자백가의 등장과 주요 사상 소개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은 다양한 사상가들에게 새로운 정치 철학을 제시할 기회를 제공했고,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등장했습니다. 유가(儒家)는 공자(孔子)를 중심으로 인(仁)과 예(禮)를 중시하며 사회의 조화와 질서를 강조했습니다. 반면 법가(法家)는 엄격한 법치와 형벌을 중시했으며, 한비자(韓非子)와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발전했습니다. 법가는 특히 진(秦) 나라의 실용적 통치와 맞물리며 진시황의 중국 통일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외에도 무위자연을 강조한 도가(道家), 공동체 평등을 주장한 묵가(墨家), 그리고 논리학을 중심으로 논변한 명가(名家, 논리/논증 중심의 사상)도 있습니다.

글을 마치며

춘추전국시대는 단순히 전쟁과 혼란만의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는 사상의 황금기이자, 이후 진·한 제국의 통치에 필수적인 사상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여러 사상들은 각각 독특한 사회적 답을 제시했으며, 법가의 실용적 통치는 특히 나중에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 중요한 방향키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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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이 빚어낸 문명 – 도시와 문자, 권력이 태어난 시기





도구에서 제사까지, 청동기 시대의 기술과 사회 변화 들여다보기

이 글의 핵심

청동기 시대는 인류가 청동을 통해 더욱 복잡한 사회 구조를 형성하고, 도시를 계획하며, 문자를 발명해 기록을 남기고, 대형 건축물을 통해 권력을 제도화해 나간 시기입니다. 이 시대의 청동기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제사와 권위의 상징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문명의 발전은 도시의 계획성, 문자의 발달, 대형 건축물을 통한 권력 집중으로 이어졌습니다.

청동기 사용의 의의

청동기는 구리와 주석을 섞어 만든 단단한 합금입니다. 이 시기에는 청동이 무기와 도구뿐 아니라 의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제기[祭器]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중국 상나라에서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제기와 도구가 발달했으며, 이러한 제기에는 동물 모양의 장식이 더해지기도 했습니다. 이는 청동기가 단순한 실용 목적을 넘어서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도시 문명의 시작

청동기 시대의 도시는 계획성과 체계성을 갖춘 공간으로 발전했습니다. 인더스 문명의 모헨조다로와 하라파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도시는 도로와 하수도, 공공시설이 잘 정비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시 구조는 공공성을 중시하며 체계적인 사회 시스템이 존재했음을 나타냅니다.

문자의 발명과 사회 변화

문자는 청동기 시대의 또 다른 중요한 발명품입니다. 수메르에서는 쐐기 문자가, 인더스 지역에서는 아직 해독되지 않은 상형문자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자 체계는 제사, 행정, 경제 활동 등 다양한 사회 영역에 이용되었습니다. 문자 발명은 기록과 정보 교환 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권력과 건축의 상징, 피라미드

청동기 시대에는 피라미드와 같은 대형 건축물이 권력의 상징으로 등장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거대한 인력과 정교한 설계를 통해 건설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정치적 권력의 집중을 상징하며, 종교와 선호가 결합된 제사 중심의 건축물이었습니다. 피라미드는 신과의 연결을 강조하는 동시에 사회적 위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구조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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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문명와 중국문명 : 두 고대 문명의 비교

카스트제도의 인도문명과 상왕조와 갑골문의 중국문명

이 글의 핵심

인도와 중국은 각각 인더스강과 황허강 유역에서 발전한 고대 문명입니다. 인도에서는 아리아인에 의해 형성된 카스트제가 신분 질서로 정착되었고 브라만교와 베다가 종교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중국은 상왕조 때 갑골문을 통해 신권 정치가 발전했으며, 주 왕조는 봉건제를 통해 지방을 통치하고 천명 사상으로 왕권을 정당화했습니다.

인더스 문명과 도시 구조

인도 문명은 인더스강(Indus River)을 중심으로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같은 도시에서 번성했습니다. 이미 기원전 2500년경에 형성된 이 도시는 미로 같은 거리 체계와 철저한 위생 관리, 그리고 공중목욕탕 같은 공공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도시 계획 및 구조는 당시 인도 문명의 높은 발달 수준을 나타냅니다. 이는 현대 도시 같은 구조로, 오늘날에도 감명 깊게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이었습니다.

아리아인과 카스트제도의 형성

이후 아리아인(Aryans)의 이주와 함께 인도 사회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리아인들은 브라만교과 카스트제(Varna)를 확산시켜 인도의 사회질서를 더욱 명확히 하였습니다. 카스트제는 사회의 계층 구조를 규정하는 시스템으로,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그리고 수드라의 네 가지 주요 계층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인도 사회를 오랫동안 구속하며 여러 문화적, 종교적 관행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상 왕조와 갑골문(甲骨文)

한편 중국 문명의 상징 중 하나는 기원전 1600년경에 시작된 상 왕조입니다. 이 시기에는 갑골문(Oracle Bone Script)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왕이 신의 뜻을 점복하여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소의 뼈나 거북의 껍질을 사용하여 문자를 새기고, 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갑골문은 또한 중국 고대 문명의 기록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글자 체계로서의 기능을 넘어, 정치와 종교가 하나로 결합된 통치 수단의 일부였습니다.

주 왕조의 봉건제와 천명 사상

이후 주(周) 왕조에서는 봉건제(Fengjian)가 발전하였습니다. 봉건제는 혈연 관계를 기반으로 지방을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각 지방을 자신의 가족이나 가문에게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였습니다. 이 시스템은 중앙 권력의 안정성을 높였고, 동시에 각 지방의 자율성을 보장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주 왕조는 천명 사상(Mandate of Heaven)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왕의 권력과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념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왕은 하늘의 뜻에 따라 통치해야 한다는 신념은 중국 정치의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인도와 중국의 신분제와 정치 사상

두 문명은 모두 농경 사회를 기반으로 발전하였으며, 각각 신분제와 정치 사상에서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도는 카스트제를 통해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 종교와 신분의 결합으로 많은 사회적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반면 중국은 봉건제와 천명 사상을 통해 정치적 신뢰성을 유지하고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체제는 각각의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이후 문화와 관습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종교와 정치의 결합

마지막으로 두 문명은 종교와 정치가 긴밀하게 결합된 체제를 형성하였습니다. 인도에서는 브라만의 의례가 정치적 권위를 부여했고, 베다(Veda) 경전이 종교적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상 왕조의 점복 정치와 주 왕조의 천명 사상이 정치적 정당화의 역할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종교와 정치가 밀착된 국가 경영이 가능했습니다.

문화를 읽다: 인장과 갑골, 베다와 천문 역법

인도 문명의 인장(주로 관료나 상인, 왕족 등이 사용하였고 다양한 문양과 글씨가 새겨져 있었음)은 상업과 신분을 상징하는 회화적인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많은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중국의 갑골문은 문자뿐 아니라,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로 활용되었습니다. 베다와 천문 역법은 각각 인도와 중국에서 고유의 사상적 틀로 작용하여 종교와 사회를 규율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각 문명의 독특성을 잘 드러내며, 오늘날 역사 연구에서도 중심적인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대의 대화: 두 문명의 유산

결국 인도와 중국 문명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지만, 그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정치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각각 고유한 방식을 선택했으며, 이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측면에서도 여전히 관찰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문명 속에 녹아든 역사와 문화는 현대에서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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